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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1 예배는 감격에 빠져야 | 2016-05-13 오후 9:47:40
| 관리자 | [조회] 1094
분류 | [ 정치 ]


김정철목사
본문 사도행전 20:7-12
우리는 사도행전을 묵상하면서 교회의 가장 근원적인 일들을 찾으려고 많은 성도들이 애쓰고 있습니다. 또,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가장 아름다운 신앙의 자랑에서 혹시라도 우리가 너무나 소홀히 여기고 있지는 않나? 생각을 하면서 믿음의 사람들에게 한마디 하자면, 가장 아름답게 나타나야 할 것은 예배가 아닌가 생각을 한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자체가 현재적이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것 이였습니다. 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배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는 만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주님이 말씀하신 소중한 예배를 드리고는 있는지 자문하여 소중한 예배가 무엇인가를 생각하여 보아야 합니다.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고 모였더니”(행20:7). 유대인들의 안식일은 토요일이었습니다. 초대교회의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날을 통하여 사망을 이기시고, 생명대신 주님을 기억한 것입니다.
물론, 그들의 모임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심으로 구원을 얻은 것에 대한 의식으로서의 모임은 아니라도,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전제로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추워야 할 가장 귀한 것은 할 것은 예배이며, 예배가 살아났어야 합니다. 예배가 살아 있다는 것은 기대하는 마음으로 알 수 있습니다.
나는 오늘의 예배를 얼마나 기대하고 있는가를 생각하면서 우리가 드리는 예배시간이 점점 짧아지고 예배를 통하여 받은 양향에 대해서는 구지 관심이 없다면, 이것은 참으로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쩌면 예배 갱신이나 회복의 자리로 돌아가야 함을 예고하는 바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사모하고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만남에 기대를 가져야 진정한 예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배가 기다려지고, 예배가 기대되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요즈음 예배를 드리는 데 인내가 요구된다고들 말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예배를 지루하게 느끼는 사람에게 조금 더 견디어 보라고 격려합니다. 예배, 즉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천태만상의 모습을 보노라면, 줄을. 긋고 교정까지 보는 읽기파, 졸면서 예배를 드리는 수면파, 수시로 시게를 들려다보는 시계파, 옆 사람과 종이쪽지에 글로 대화하는 쪽 지파, 예배 후에 있을 회의를 준비하는 회의파, 성경 읽기로 설교 시간을 때우는 실속파, 등 이런 식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어제 오늘의 예기만은 아니라는데 심각합니다.
물론 이런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봅니다만, 성령님께서 참으로 안타까워하실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주님이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배에 대한 질문을 할 때 주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자여 내 말을 들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4:21-24)
신령과 진정으로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영과 진리 안에서 우리는 믿습니다. “참” 예배는 장소가 아니라! 방식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는 예배의 장소가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그들이 안식 후 첫날에 떡을 떼려고 모였을 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저희가 모일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때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마25:25)
이 부분에 대해 많은 해석이 있을 수 있지만, 본문에 나오는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애찬을 겸한 떡을 떼어주는 의식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진정한 존재를 기억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밤중까지 들으려는 열정이 있었다는 데에서도 바로 주님의 존재를 확인하는 마음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현현(玄玄)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깊고 오묘함, 성령의 임재하심입니다. 주님은 마지막으로 떠나실 때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가면 너희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마!”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모인 분명한 이유는 주님이 보내시는 성령의 임재를 사모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성령님을 통하여 영적인 만남을 연결하는 하는 예배에 있어서 “영” 이라는 말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주님은 영이십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바꾸어서 한다면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들은 예배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6장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홍수로 멸하시게 된 이유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상황을 하나님께서 “세상에 죄악을 관영”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창조물을 통하여 영광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들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삶을 살면서 결국에는 하나님 앞에 죄를 짓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하나님의 방법대로 사는 사람, 즉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들은 그릇된 예배에 대해 책망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말씀을 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 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 하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는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필 때에 내가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ㅣ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사1:11-15
예배를 경시한다면. 바로 진행하라!
성경에는 예배라고 하 기에 참으로 초라하기 그지없던 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도고라는 한 청년이 창에 걸터앉아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에서 떨어”(행20:9)졌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떡을 떼는 자리에 주님의 현존을 원하는 무리들이 있었는데 그 속에 유두고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배와 말씀과는 관계없는 사람을 깨우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기다란 막대기에 솜방망이 같은 것을 묶어놓고 예배 시 조는 사이를 오고가면서 조는 자들을 툭툭 건드려서 깨웠던 것입니다.
사실 예배 시간에 졸기로 작정한 듯, 사람들이 몇 있습니다. 그들은 애초 교회에 올 때에 졸리기로 작성하고 자리를 찾습니다. 졸아도 앞에서 잘 안 보일 줄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청교도인 토마스 왓슨은 “예배시간에 조는 사람은 몸은 교회당에 있으나 마음에는 침대에서 뒹구는 것과 다름이 없다. 만약에 당신이 졸음을 참을 수 없다면 금식하고 하나님 앞에 예배해야 한다.” 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졸아서 유두고 처럼, 낙상하지 말고, 졸기로 작정한 사람들은 금식을 하고 참석하시기 바란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을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예배이니라.”(롬12:1)
교회는 예배를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곳입니다. 지상의 소회는 완전하지 않지만 하나님은 교회의 본질적인 것들이 회복되기를 원하십니다. 사회봉사도 없고 이웃에 대한 구제도 없으면 교회가 아니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배가 살아 있지 않으면 봉사와 구제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고회는 사회 개역을 위한 단체로 부림 받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예배를 드려야만 합니다.
성령과의 사귐이 있는 장소이어야 하 기 때문입니다.
만남의 감동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지난 KBS방송국에서 이산가족 찾아주기는 진한 감동을 우리는 맛보았습니다. 정치와 이념 때문에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자녀라든지 자기의 부모라는 사실이 확인이 될 때 그들은 참으로 감격적인 눈물로 해후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보는 이도, 그리고 세계도 함께 울었습니다. 보고 싶은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만나고 있습니까? 주일에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가 그토록 그리워지고 그토록 하나님과의 만남이 감격스럽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시고 구속하시고 의로우신 주님이 나를 높이 들어주셨음에 감격스럽습니까?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이 있다면 교회 밖의 삶 속에서도 이원론적인 삶을 살지 않고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말입니다.
마즈막으로 예배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들은 먼저 가서 드로아에서 우리를 기다리더라.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세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례를 머무니라”(행20:5-6)
바울은 그가 환상을 본 드로아라는 지역에 가서 이례 동안 말씀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 말씀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은 7절에 “저희에게 강론할 쌔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11절에서는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예배에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종교개혁 시대에 제네바에서 설교를 하던 존 칼빈은 다음 주에 설교할 성경 본문을 미리 알려준 적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광고가 아니라 교인들이 다음 주에 있을 설교 본문을 미리 읽고 묵상하다가 하나님의 말씀속에 담긴 풍성한 음성을 기다리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그리고 이 만남의 진수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씀이 밤중까지 계속 이어졌어도 그들은 말씀에 감동을 받아 시간가는 줄 몰랐습니다. 그리고 말씀 후에는 날이 새도록 이야기를 나눈 것입니다. 말슴은 진리입니다. 진리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가를 알려 줍니다.
진리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가를 알려줍니다. 진리 없이는 예배도 없습니다. 구약의 시대에는 하나님이 직접 말씀을 하셨지만 지금은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예배 중에 설교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인가? 하고 되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사람이 설교를 하였다 할지라도 그 설교가 성경을 말하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말하고 있다면 그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얼마 전만 해도 삼각산에 많은 기독인들이 밤을 산속에서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날이 밝으면 삼각산에서 바라보는 일출은 참 아름답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모세가 시내 산을 오를 때에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올랐는데 나도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산에 올랐지만, 하나님의 대신 아침 일출과 서울의 시가를 내려다보면서 경관에 만족할 때가 있었습니다.
예배는 시내 산을 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한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만나는 심정으로 예배에 임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그 거룩한 산에 올라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곳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ㅁ성을 들었습니다. 그곳에서 자신의 부족함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거룩한 헌신을 다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감격으로 그 산을 내려 왔습니다.
하나님을 만날 것이라는 기대도 없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것이라는 소망도 없이 오르는
예배의 감격에 다시
한 번 빠져들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어려운 이 시대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하여 기대하며 참여하는 예배를 드림으로 그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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